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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경향신문

민주주의냐 국익이냐 갈등하는 미국의 대외정책

ㆍ‘중동 민주화’ 선택적 개입 논란


튀니지에서 불기 시작한 아랍혁명의 바람이 리비아, 시리아, 예멘, 바레인 등지에서 역풍을 맞고 있다. 특히 미국은 리비아와 달리 반정부 시위에 대해 강경진압으로 일관하고 있는 시리아와 예멘, 바레인 정부를 비난하면서도 별다른 개입 움직임은 보이지 않아 ‘선택적 개입’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다. 이 때문에 세 나라 정권은 이를 정권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로 받아들여 국민들의 개혁 요구를 묵살하는 반면 반정부 시위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미국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리비아 군사개입이 민주주의와 국익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려는 미국 대외정책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이 시리아, 예멘, 바레인 정권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니컬러스 번스 전 미 국무부 차관(하버드대 교수)은 지난달 24일 AP통신에 “우리가 항상 방부제 역할을 할 수 없다”면서 “미국은 이들 나라에 커다란 국가안보 이익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 세 나라에 어떤 국가안보 이익이 있는 것일까.

시리아 현 정권은 평화협상 ‘채널’
 

◇ 중동평화 구도의 핵심 시리아 = 지난달 18일 시작된 반정부 시위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46)은 2000년 집권 후 최대 위기에 빠졌다. 시리아 사태는 비단 알 알사드의 위기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란과 함께 반미, 반이스라엘의 선봉이라는 시리아의 중동 내 지위를 감안하면 그 의미는 훨씬 크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 패트릭 실은 지난달 외교전문지 폴린폴리시에 기고한 ‘시리아 시한폭탄’이라는 글에서 “중동 전체에 불안을 야기할 국가가 있다면 리비아가 아닌 시리아”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에 대해 시리아 사태에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시리아가 중동의 시한폭탄이 될지는 불확실하지만 알 아사드가 국민의 개혁 요구를 거부한 채 강경진압을 고집할 경우 대규모 유혈사태는 물론 최악의 경우, 시아-수니파 간의 종파갈등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시리아의 위기는 중동 역학 관계에서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시리아는 이란의 가장 가까운 전략적 우방이자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에 무기를 제공하는 배후세력이다. 이런 지위 때문에 시리아의 위기는 곧 ‘이란-시리아-헤즈볼라-하마스 축’의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시리아 사태를 바라보는 미국의 심경은 복잡하다. 지난달 27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알 아사드 대통령에 대해 한 발언은 미국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클린턴 장관은 CBS방송의 일요 대담 프로그램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해 “최근 몇 달 사이 시리아를 방문한 많은 의원들은 알 아사드가 개혁주의자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정권 붕괴보다 안정에 기대를 걸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바레인 개입 땐 종파분쟁 우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시리아의 현상유지가 오히려 중동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시리아는 이란과의 긴밀한 유대나 헤즈볼라와 하마스에 대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잠재적인 평화협상 파트너로 간주돼 왔다.

◇ 미 제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 = 지난 2월부터 국민의 다수인 이슬람 시아파의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겪고 있는 수니파 왕정국가 바레인에 대해 미 백악관은 “우리는 바레인 정부가 반정부 세력과 대화하기를 촉구한다”(3월13일 성명)고 밝혔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바레인 국왕은 그 후 반정부 시위를 ‘외국의 음모’라고 비난하고 그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면서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소국인 바레인이 믿는 구석은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에서 기인한다. 바레인에는 걸프지역과 홍해, 인도양을 아우르는 미 해군 제5함대의 사령부가 있다. 수니파의 중심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바로 옆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든든한 버팀목이다. 사우디는 지난달 중순 1990년대 중반 이후 처음으로 군병력을 바레인에 파견, 끈끈한 유대를 과시했다. 반정부 시위가 자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는 동시에 시아파가 바레인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이란과 이라크 등 시아파 국가들은 바레인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을 비난하면서 수니파 국가들의 군사 개입의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지난 2일 반정부 시위 사태 진압을 위해 병력을 지원한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겨냥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합의가 없는 한 다른 나라의 내부 분쟁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자칫 수니-시아파 간 종파분쟁이 빚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예멘정권 붕괴는 실질적 위협”
 

◇ 알 카에다 척결 파트너 예멘 정권 = 지난 1월 말 이후 시작된 반정부 시위로 정권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은 지난 3일 야권이 반정부 시위 이후 처음으로 제시한 권력이양안을 사실상 거부했다. 살레는 지지자들과의 모임에서 “권력이양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돼 있지만, 평화롭게 헌법적 틀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면서 즉각 퇴진 등 야권의 제안을 거부했다.

32년간 철권통치를 해온 살레가 퇴진과 정권유지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것이 야권의 주장이다. 실제 오바마 행정부는 지난달 18일 예멘 사태와 관련해 성명을 발표했지만 살레 정권의 시위대에 대한 폭력행위를 비난하고 평화적인 시위를 보장하라는 입장을 드러내는 데 그쳤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지난달 하순 “살레 정권의 붕괴는 미국에 실질적인 위협”이라고 언급했다. 예멘 야권 대변인인 모하메드 알 사브리는 “이는 살레 편을 드는 미 행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으로 살레가 미국인들을 겁주기 위해 알 카에다 분자들에게 남부에서 혼란을 만들 수 있도록 청신호를 보내줬다”고 비난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미국에 살레는 예멘의 알 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와의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될 파트너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 때문에 살레 정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AQAP는 이를 비웃듯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AQAP의 지도자 안와르 알 올라키는 지난달 31일 알 카에다 온라인 매거진에 올린 글을 통해 “아랍에 들어설 새 정부는 기존 정부보다 취약해 알 카에다에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R2P’ 개념 도입 논란>

 미국은 리비아 군사개입의 명분으로 ‘국민보호의무(Responsibility to Protect·R2P)’라는 새 개념을 내세웠다. 2005년 유엔 정상회의에서 정립된 이 개념은 민간인 학살 방지를 위한 인도적 차원에서 군사개입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R2P 개념은 미국이 그동안 적용해온 군사개입 원칙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난 1일 ‘더 뉴 리퍼블릭’ 인터넷판에 따르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의 군사개입 원칙은 ‘제한전’이었다.

1980년 이후 미국의 군사개입 원칙은 ‘와인버거·파월 독트린’으로 대표된다. 명분이 확실하고, 중대한 국익이 걸려 있으며, 국민이 지지하고, 퇴로가 확실하며, 승리가 보장된 전투에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최단기간에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 당시 합참의장을 지낸 콜린 파월이 주도했다. 91년 걸프전에서 이 원칙은 위력을 발휘했다.

와인버거·파월 독트린은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부시·럼스펠드 독트린으로 바뀌었다. 이 원칙은 아프가니스탄전과 이라크전을 이끈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착안한 것으로 경량화, 기동화, 유연화, 신속화를 골자로 한다.


R2P가 리비아 사례를 계기로 미국의 새로운 군사개입 원칙으로 자리잡게 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도덕적인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리비아 군사개입 이후 첫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은 억압이 있는 곳마다 군사력을 활용할 수 없다. 비용과 개입의 위험을 감안하면 우리는 행동에 대한 국익을 고려해야 한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스티븐 그로브슨은 지난달 31일 재단 웹사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R2P를 군사개입의 정당성 근거로 삼은 것은 실수”라면서 “향후 미국의 행동을 제약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