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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세계 금융위기 대처 ‘폴슨·버냉키의 선택’ (2008 10/07ㅣ위클리경향 794호)


대공황 이후 최대 금융위기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보다 더 주목받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과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그들이다. 금융위기 속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환상의 콤비 플레이 덕분에 이들 뒤엔 ‘경제 대통령’이니 ‘투자은행 통수권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폴슨 재무장관은 이번 금융 위기에서 한 역할 덕택에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 이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재무장관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누구를 살리고 죽일 것인가’는 솔로몬의 선택도 그가 한다. 그의 선택에 따라 제5의 투자은행(IB)인 베어스턴스는 살았지만 제4의 IB인 리먼 브러더스는 파산 보호 신청이라는 사형 언도를 받았다.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AIG는 850억 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정부로부터 지원받게 됐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초래한 모기지 기관인 페니메이와 프레디맥은 2000억 달러에 미 정부 관리체제로 편입됐다. 그리고 미국의 1년 국방비보다 많은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폴슨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미국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의 운명이 바뀌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시사주간 ‘타임’(8월 29일자)은 폴슨을 이번 금융 위기의 승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으면서 ‘B’ 학점을 줬다. 버냉키 FRB 의장은 이번 금융 위기로 투입한 1조 달러가 넘는 구제금융을 감독하는 주식회사 ‘엉클 샘’의 최고경영자(CEO)라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자율을 조정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통화정책의 사령탑이라는 전통적 역할은 이 때문에 뒷전으로 밀린 느낌이 들 정도다.
두 사람이 재무장관과 FRB 의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이 시장주의 신봉자에서 국가개입주의자로 변신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폴슨은 32년 동안 월스트리트에서 선진 금융기법으로 돈을 버는 데 일가를 이뤘고, 버냉키는 학문을 탐구해온 전형적인 학자였지만 정부의 규제와 시장 개입에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교수 출신 버냉키와 투자은행장 출신의 폴슨이 낡은 시장주의라는 도그마를 묻었다’는 뉴욕타임스(8월 21일자) 기사 제목은 두 사람의 변신을 잘 보여준다. 버냉키가 2005년 10월 부시 행정부의 통화정책 책임자가 되고, 이어 2006년 7월 폴슨이 재무장관이 되면서 두 사람은 ‘부시호’라는 한 배를 타는 신세가 됐다. 특히 2006년 여름부터 터져나온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위기에서 비롯한 금융 위기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을 서로 알게 된 지 불과 2년 만에 ‘금융 위기와 싸워야 하는 야전사령관’으로 거듭나게 한 계기가 됐다.
월스트리트 최고의 IB인 골드만삭스의 CEO였던 폴슨이 골드만삭스에서 같이 일했던 조슈아 볼튼 전 백악관 비서실장에게서 존 스노우 재무장관 후임으로 추천받았을 때만 해도, 그는 2년여밖에 남지 않은 부시 행정부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뤄내지 못할 것 같아 주저했다. 그러나 폴슨은 재무장관이 되자마자 부시 경제팀의 리더가 된다. 시사주간 ‘뉴스위크’(8월 29일자)는 폴슨이 부시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지면서 사실상 ‘투자은행 통수권자’가 됐다고 표현했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했던 것처럼 자신의 고객들에게 조언했다. 월스트리트 시절과 다른 점은 당시 고객들은 CEO였지만 지금은 납세자와 대통령 그리고 국제 금융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토니 프래토 백악관 부공보수석은 “행정부의 최고 정책결정자이자 대통령의 최고 경제보좌관이며 최고 경제 해설가”라고 평가했다. 흥미로운 점은 2006년 7월 캠프데이비드 별장에서 부시를 처음 만나던 날 폴슨은 “퇴임 전까지 미국이 아무런 불안 없이 지나간다면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예언이 적중했지만 폴슨은 사상 최대의 금융 위기가 불안의 실체가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프린스턴대 교수를 지내던 버냉키는 2005년 10월 앨런 그린스펀 후임으로 FRB 의장이 된다. 버냉키의 과거 행보는 폴슨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뉴욕타임스 8월 21일자 보도에 따르면, 어쩌면 지금의 위기는 버냉키에겐 평생을 연구해온 이론적인 관점이 현실 시스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 정점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1990년대 일본의 금융 위기 연구에 천착해온 버냉키는 언젠가 자신의 연구가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으로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특히 뉴욕 FRB 이사를 맡고 있던 2002년 버냉키는 저명한 화폐경제학자인 밀튼 프리드먼의 90회 생일 파티에서 과거 대공황 당시 미국 정부가 범한 실책을 언급하면서 다시는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폴슨의 별명은 ‘망치’다. 다트머스대학 시절 저돌적으로 상대선수를 밀어붙이는 미식축구선수로 명성을 날려 얻은 것이다. 폴슨의 친구인 존 브라이언은 “그는 허리케인처럼 변화가 많은 세계에 익숙하다”면서 “그는 데드라인, 결정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을 하는 세계에 살아왔다”고 말했다. 반면 버냉키의 별명은 ‘헬리콥터 벤’이다. 2002년 한 연설에서 “유동성 공급을 위해서라면 FRB가 긴급 자금을 헬리콥터로 뿌리면 된다”고 한 발언 때문이다.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은 다르다. 과거 부시 대통령의 경제 보좌관을 지낸 앨런 허바드는 뉴욕타임스에 “행크(폴슨의 별칭)는 매우 활동적이고 문제를 풀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적극적인 성격인 데 비해 벤은 매우 자제하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별명이 시사하듯 두 사람은 7000억 달러의 구제금융 법안을 마련해 부시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 적극적으로 알리고 협조하는 과정에서 저돌적인 추진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폴슨은 각종 방송에 나가서 구제금융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부시 행정부의 ‘얼굴마담’ 역할을 한 반면, 버냉키는 구제금융의 역사적 기반을 설명하는 이론가 역할을 맡았다. 어쨌든 과거 정치적인 과정에 한 번도 깊숙히 개입해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은 사상 최대 금융위기 속에서 대통령 못지않은 정치적 인물이 됐다.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밤이 깊다고 한다. 어쩌면 두 사람은 지금이 찬란하게 밝아올 아침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두 사람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사상 최대의 금융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1조 달러 이상을 투입한 구제금융 정책의 성패 여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