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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세계은행 총재 든든한 ‘백’은 미국 (2007 05/01ㅣ뉴스메이커 722호)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63)가 사임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울포위츠 총재는 지난해 말 물러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과 함께 ‘이라크전의 기획자’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2005년 6월 세계은행 총재에 임명됐으니, 5년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레임 덕’에 걸린 셈이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스스로 불러온 인사권 남용 의혹이다. 울포위츠의 입장은 단호하다. 사과는 하되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임명한 부시 대통령의 지지도 여전하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울포위츠의 ‘버티기’로 세계은행의 명성이 실추하는 등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반발도 무시할 수 없어, 그의 앞날이 장밋빛만은 아니다.

사임 압력의 발단은 인사권 개입 의혹이지만 그 이면엔 복잡한 국제정치의 본질인 ‘파워게임’이 숨어 있다. 4월 16일 뉴욕타임스(NYT)의 분석처럼 울포위츠 사임 논란에는 부시 행정부가 일으킨 이라크전에 대한 강한 반감과 분노가 깔려 있다. 한편으로는 세계은행 내 개혁파와 반개혁파의 대결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 동안 세계은행 총재직에서 소외됐던 일부 유럽 국가들의 불만도 사임 논란 안에 내재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논란 배경엔 국제정치 ‘파워게임’

현재까지 울포위츠의 인사권 등 권력남용과 관련된 의혹은 크게 3가지다. 울포위츠의 자리를 뒤흔드는 첫 번째 의혹은 애인 샤하 리자(53)의 인사 및 승진과 관련해서다. 이 의혹은 영국의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초로 제기했다. 울포위츠는 2005년 6월 미 국방부 부장관에서 세계은행 총재로 자리를 옮긴 뒤 그해 9월 세계은행에 근무하고 있던 리자를 미 국무부로 파견했다. 사내 연애를 금지하는 규정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세계은행 총재와 직원 이전에 애인 관계였다. 울포위츠는 리자를 국무부로 자리를 옮겨주면서 규정에 어긋난 승진과 연봉인상을 해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두 번째 의혹은 울포위츠와 함께 입사한 부시 행정부의 관료 출신인 로빈 클리블랜드와 케빈 켈럼스 등 2명에게 경력 25년차 직원에 준하는 연봉인 25만 달러를 책정했다는 것이다. 이 의혹 역시 FT가 제기한 것이다. 세 번째 의혹은 이라크전 옹호자 3명을 정치적인 배려 차원에서 세계은행에 취직시켰다는 것이다. 민간국제통신사인 IPS는 4월 13일 “지난 2년간 울포위츠가 기용한 국제적 인사 5명 가운데 3명이 철저한 이라크전 옹호론자”라고 보도했다. IPS에 따르면 울포위츠는 지난달 요르단 부총리 출신 마르완 무아셔를 외사담당 부총재로 임명했다. 이보다 9개월 전인 지난해 6월에는 스페인 외무 장관 출신 아나 팔라치오를 세계은행 수석부총재 겸 총괄고문으로, 엘살바도르 재무장관을 지낸 후안 호세 다보웁을 두 명의 이사 가운데 한 명으로 각각 임명했다. 세 사람 모두 이라크전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한 인물이다. 이쯤되면 울포위츠가 이라크전에 도움을 준 각국 인사들에게 보은하기 위해 총재로서의 인사권을 활용했다는 의심을 받을 법하다. 이뿐만 아니다. NYT는 4월 19일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다. 울포위츠가 국방부 부장관으로 있던 2003년 개인적으로 애인 리자를 당시 이라크와 관련해 국방부의 계약사업을 하던 회사에 소개시켜줬다는 것이다. 국방부 자체 감사 결과 부정행위는 없었다고 하지만 리자에 대한 인사권 남용 의혹과 맞물려 울포위츠에겐 부정적 요소임에 틀림없다.

미국 언론도 적극적 옹호론 펼쳐

울포위츠에 대한 사퇴 목소리는 은행 내부와 일부 유럽국가, 주요 언론 등 전방위적이다. 우선 은행 내부의 목소리로, 울포위츠의 보좌관인 그램 휠러는 4월 18일 세계은행 부총재단과의 회의에서 울포위츠의 사퇴를 촉구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세계은행 내에서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는 휠러는 1년 전 울포위츠가 임명한 두 명의 보좌관 가운데 한 명으로 뉴질랜드 재무부에서 일하다 세계은행 재무담당관으로 합류했다. 울포위츠는 이에 대해 은행 관리를 개선하겠다는 일반적인 입장을 밝히면서 사퇴 의향은 없다는 예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은행 직원협의회도 4월 13~15일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 춘계 총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12일 사퇴를 요구했고, 울포위츠는 기자회견장에서 여자친구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빈곤 구제와 관련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성과를 갖고 평가해 달라”고 주문했다.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각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인 세계은행 개발위원회도 “최근 일어나고 있는 사태는 중대한 문제”라면서 그의 도덕성을 간접적으로 질타했다. 세계 주요 언론 가운데는 리자 건을 폭로한 FT의 반발이 가장 강하다. FT는 4월 12일과 13일 연속으로 사설을 싣고 “세계은행의 신뢰를 위해서라도 실질적 인사권을 가진 부시 미 대통령이 용단을 내려줄 것”을 촉구했다. 일부 유럽국가도 비공식적으로 그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일부 유럽 국가들은 울포위츠의 사임을 원하면서도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는 공식적으로 반대할 경우 세계은행 총재 자리는 미국이, 국제통화기금 총재직은 유럽이 맡아온 오랜 관행을 깰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부시 행정부와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적극적인 옹호론을 펴고 있다. 다나 페리노 백악관 대변인은 4월 19일 “전에도 말했듯이 부시 대통령은 여전히 울포위츠 총재를 신뢰하고 있다”며 사임 압력에 쐐기를 박았다. WSJ은 4월 16일자 사설에서 “울포위츠에 대한 사퇴 음모는 그가 총재가 될 때부터 있었다”면서 “이는 울포위츠가 추진해온 세계은행 개혁론에 반발하는 측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오히려 “울포위츠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보다는 좀 더 항변의 목소리를 낼 것”을 주문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의 전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마거릿 칼슨은 블룸버그통신 4월 19일자에 기고한 칼럼에서 “요즘은 불명예를 입은 사람은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인 돈 아이머스처럼 1주일이면 스스로 옷을 벗는다”고 지적했다. 경력 30년의 유명 방송인인 아이머스는 4월 4일 자신이 진행하는 ‘아이머스 인 더 모닝’ 라디오 방송을 통해 러트거스대학 여자농구팀 선수들을 ‘곱슬머리의 창녀들’이라고 흑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 뒤 여론의 뭇매를 맞고 8일 후 방송이 폐지되면서 하차한 인물이다. 칼슨의 논지는 세계은행의 부패를 청산해야 할 임무를 띤 총재가 오히려 부정을 저질렀으니 사임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24개국 대표들이 모인 세계은행 집행이사회는 울포위츠와 관련한 의혹을 조사 중이다. 도덕성이 승자가 될지, 파워게임이 승자가 될지 자못 관심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