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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경향의 눈

[경향의 눈8] 트럼프의 '코로나19 촌극'(200402)

‘5시의 촌극’이라는 말이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이 사이공(현재의 호찌민)의 한 호텔에서 오후 5시마다 했던 전황 브리핑의 별칭이다. 이 브리핑이 촌극으로 희화화된 데는 이유가 있다. 진실보다 거짓말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리처드 파일 당시 AP통신 사이공 지국장의 묘사가 정곡을 찌른다. “동남아시아의 부조리극 극장에서 최장 공연되고 있는 희비극.” 실제로 브리핑에서는 기자들과 미군 간 가짜 통계와 거짓 전황을 둘러싼 설전이 벌어지곤 했다. 그 후 ‘5시의 촌극’은 거짓말로 정부의 신뢰를 갉아먹는 행태를 비꼬는 대명사로 활용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코로나19 대응을 보면 ‘5시의 촌극’이 새삼 떠오른다. 트럼프는 지난달 코로나19 국가비상사태 선포 이후 매일 저녁 백악관에서 ‘코로나 브리핑’을 하고 있다. 그 분위기가 ‘5시의 촌극’을 쏙 빼닮았다. 그의 말 상당 부분은 거짓말과 자랑으로 점철돼 있다. 기자들의 질문은 얼버무리거나 무시하기 일쑤여서 곧잘 언쟁으로 이어진다. 결국 코로나19라는 위기 앞에서 책임 있는 대통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의 리더십은 놀림감이 될 뿐이다. 그의 ‘코로나19 촌극’은 언론 인터뷰에서도 나타난다. 압권은 지난달 24일 밤 CNN과의 인터뷰였다. 트럼프는 이날 낮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부활절(4월12일)을 경제활동 재개 시점으로 삼겠다고 했다. 기자가 물었다. “누가 부활절을 제안했나?” 트럼프의 답변은 가관이었다. “난 그저 그것이 완벽한 때라고 생각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급증해 경제활동 재개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던 때였다. 실제로 이틀 뒤 미국은 코로나19 확진자 최다국이 됐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과학적 근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지난달 중순 논란을 빚은 독일 백신 독점 시도는 그의 또 다른 면을 부각시켰다. 트럼프가 독일 바이오기업이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의 독점권을 갖고자 10억달러를 제안했다는 독일 언론의 보도가 발단이었다. 독일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독일 경제장관이 “독일은 판매용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코로나19 백신을 어느 한 나라가 독점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미 정부의 적극 해명으로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남이야 어찌 되든 자국의 이익만 좇는 ‘미국 우선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준 씁쓸한 사례였다.

지난달 22일 이란에 코로나19 지원을 제안한 것은 뜻밖의 행동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불과 5일 전 미 정부가 이란 기업 9곳과 개인 3명에 제재를 내린 사실을 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경제 제재와 인도주의적 지원은 다른 문제라는 게 미국의 주장이다. 진정으로 돕길 원한다면 코로나19 지원품이 원활히 이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제재를 완화하는 게 먼저다. 병 주고 약 주는, 고약한 심보가 아닐 수 없다. 인도주의 가면을 쓴 늑대의 행동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베네수엘라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사흘 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마약테러 혐의로 기소했다. 1500만달러의 거액 현상금도 내걸었다. 베네수엘라 또한 미국의 경제 제재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미국은 이란에 보인 지원 시늉조차 베네수엘라에는 하지 않았다. 코로나19 상황 틈탄 야비한 행동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지적에도 아랑곳없이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줄기차게 부르던 일은 어떤가. 인종주의와 남 탓하기 좋아하는 트럼프의 본심을 이보다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례는 없다. 그 결과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이 말이 쏙 들어갔다. 시점이 참으로 묘하다. 미국의 확진자 수가 세계 최고에 이른 즈음이니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 촌극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인기는 올라갔다. 전쟁이나 대공황 같은 국가적 위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애국심과 희생에 바탕을 둔 결집효과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 중 제임스 매디슨,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리처드 닉슨, 조지 W 부시 모두 전쟁 덕에 재선에 성공했다. 코로나19 확산에도 강 건너 불구경 하던 트럼프가 갑자기 ‘전시 대통령’을 자처한 것은 당연히 재선을 겨냥한 행동이다. 미국의 진보성향의 프리랜서 작가 에드 램펠은 ‘프랭클린 도널드 루스벨트’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만들었다.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루스벨트와 트럼프를 결합한 것이다. 트럼프가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할 지도자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의미다. 트럼프가 제2의 루스벨트가 된다면 재선은 당연히 그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