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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탁신 사임 결정타는 ‘금 간 우정’(2006-04-14)

사업파트너인 재벌 손티 반탁신운동 선봉에… 경제적 이권 앞에 영원한 동지는 없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인간사의 본질을 꿰뚫은 이 말은 특히 정치판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정치판에서는 오늘의 동지가 언제 적이 될지 모른다. 오랜 친구도 예외가 아니다.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지난 4일 탁신 친나왓 총리(57)의 사임발표로 진정국면에 들어선 태국 정국의 혼란상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언론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고, 정부의 부패와 권력남용 등을 견제하는 ‘피플파월’와 탁신 총리 정부의 대결이었지만, 그 이면엔 탁신 총리와 사업파트너이자 미디어 재벌인 손티 림통쿤 사이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다툼이 자리하고 있다.

탁신 총리가 사임을 발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손티였다. 물론 총선 승리를 선언한 탁신 총리의 사임 발표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78)을 만난 뒤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무리 펀치’를 날린 국왕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반탁신 정서에 불을 지펴 국민들을 뭉치게 하고 결국 사임을 이끌어낸 사람은 손티다. 손티는 지난해 9월 9일 자신이 진행하던 ‘타일랜드 위클리’라는 TV 토크쇼 프로그램을 탁신 총리가 중단시킨 데 대한 반발로 반탁신운동을 선언했다. 그후 손티는 반탁신 시민연대모임 ‘국민민주주의연대(PAD)’를 실제로 주도하며 반탁신 운동 선봉에 섰으며, 결국 탁신 총리의 사임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그렇다면 탁신과 손티의 관계에 이상기류가 흐른 것은 그때부터일까? 아니다. 태국 언론들에 따르면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간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였다. 금이 간 원인도 탁신의 ‘언론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사업상 이해관계’였다. 태국 일간지 ‘더 네이션’은 손티가 탁신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손티가 정부라는 목장에서 현금을 낳는 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TV프로 중단시키자 등 돌려

이 신문에 따르면 탁신과 손티 두 사람의 ‘애증 관계’는 1992년으로 거슬러간다. 매니저(푸짯깜) 신문을 지주회사로 하는 미디어그룹을 소유한 손티는 자신의 통신회사 ‘인터내셔널 엔지니어링 컴퍼니(IEC)’를 공개하기 전, 지분 17.5%를 통신업계의 떠오르는 별이던 탁신에게 주당 10바트에 취득도록 했다. IEC는 증시에 상장되면서 주당 가격은 250바트로 25배나 올랐다. 탁신은 IEC 주식을 주저하지 않고 매각해 6억~7억 바트라는 막대한 이익을 챙기며 손티와 결별했다. 불화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1995년 경제 활황기에 손티는 탁신을 따라 위성사업에 뛰어들었다. ‘친(Shin) 위성’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탁신은 1993년 12월 방송용 위성인 ‘타이콤1’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손티도 뒤질세라 라오스 정부와 공동으로 ‘라오 스타’라는 회사를 설립해 1998년과 1999년 각각 ‘L스타1’과 ‘L스타2’라는 위성을 발사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개된 두 사람의 사업 경쟁은 1997년 태국 바트화 대폭락에 따른 경제위기로 명암이 극명하게 갈린다. 손티의 위성 및 미디어 사업은 용해되기 시작했다. 1996년 경제주간지 ‘포춘’이 6억 달러(120억 바트)에 이른다고 평가한 그의 재산은 1년 뒤 200억 바트나 되는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되며, 결국 파산을 선고하게 된다. 반면 탁신은 경제위기에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으며, 결국 태국 최고의 갑부로 자리 잡게 됐다.

측근 해임 ‘돌아올 수 없는 강’ 건너

그냥 주저앉을 손티가 아니었다. ‘불사조’ 손티는 재기를 위해 탁신과의 관계회복을 추진했다. 그는 친탁신계 인물뿐만 아니라 자기 소유의 미디어를 이용해 경제위기를 초래한 당시 민주당 정부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한편 ‘탁신 치켜세우기’에 나섰다. 탁신은 1998년 태국 경제 재건을 목표로 ‘새롭게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타이락타이’당을 창당, 2001년 집권에 성공했다. 손티는 비로소 탁신 진영으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손티의 사람들은 탁신 정부 속으로 하나하나 들어갔다. 나중에 크룽타이뱅크(KTB) 은행장이 된 위롯 누아카르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손티는 매니저 신문을 활용해 탁신 총리가 역대 최고의 총리라면서 그의 지도력을 칭송했다. 그 결과 손티는 토크쇼 ‘타일랜드 위클리’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으며, 2개의 TV채널도 소유하게 됐다. KTB는 손티의 부채를 18억 바트에서 2억 바트로 탕감해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탁신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했다. 태국 중앙은행 총재인 프리디야톤 데와쿤라가 400억 바트에 달하는 부실 채권을 정리하지 않을 경우 해임하겠다고 위롯을 위협한 것이다. 손티는 프리디야톤 총재를 맹공했다. 그러나 프리디야톤 총재는 탁신 총리를 찾아가 중요 서류를 보여줬으며 탁신은 프리디야톤 총재와 위롯 은행장 간의 갈등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위롯은 KTB 은행장 연임에 실패했고, 손티는 다시 좌절을 맛봤다. 그동안 엄청난 돈을 TV사업에 투자해온 손티는 TV사업도 잃고, ‘타일랜드 위클리’도 진행할 수 없게 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손티에겐 탁신을 친구에서 적으로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손티는 방송을 할 수 없게 되자 타마사 대학이나 룸피니 공원 등 공개장소에서 직접 국민들을 만나 탁신 총리의 부패와 권력남용을 맹공했다. 탁신 총리의 권력남용과 정부내의 갈등을 국민들에게 까발림으로써 손티는 정치적인 지지는 물론 신뢰까지 얻을 수 있었다. 손티는 반 탁신 운동에 돌입하면서도 결코 대중들에게 사업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국왕이라는 권위를 통해 탁신 총리를 ‘불경죄’로 몰아붙였다. 그는 대중집회 때 “우리는 국왕을 위해 싸운다”는 슬로건을 내걸었으며, 이 전략은 대중들에게 먹혀들었다.

결국 최고경영자(CEO) 출신으로 역대 총리 가운데 유일하게 4년 임기를 마친데다 연임에 성공해 국민들로부터 찬사를 받던 탁신 총리가 무너지게 된 이면에는 사업파트너였던 손티와 이해관계를 둘러싼 ‘죽기살기식’의 투쟁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사가 그렇듯 손티가 탁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탁신이 손티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