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각국 정부의 적 ‘어산지 죽이기’ (2010 12/14ㅣ위클리경향 904호)

ㆍ위키리크스 설립자 인터폴 수배령… 미국은 간첩법 적용 적극 검토

비리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미국을 뒤흔들고 있다. 지난 11월 28일(현지시간)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해외공관과 국무부가 주고받은 외교전문 25만여건은 ‘케이블 게이트’로 번지고 있는 상황이다. 12월 2일 현재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은 당초 예고한 25만여건 가운데 600여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잉크 한 방울이 온 수조의 물을 오염시키는 것과 같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나머지 문서가 모두 공개됐을 때 미칠 파장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애써 다른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일부 국가가 미국을 비난하는 등 후폭풍이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위키리크스와 그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39)의 기밀 폭로 행위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어산지의 입과 발을 묶으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강화될 전망이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가 지난 11월 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인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터넷시대의 대표 언론인으로 부상한 어산지는 인터폴의 수배를 받는 도망자 신세에 처해 있다. (제네바, AP연합뉴스)


위키리크스의 미 국무부 외교전문 공개는 지난 4월 이라크 동영상, 지난 7월 이라크 전쟁 일지와 지난 10월 아프가니스탄 전쟁 일지 공개에 이은 것이다. 하지만 그 파급력과 후폭풍은 이전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세계 외교의 9·11 테러”라는 프랑코 프라티니 이탈리아 외무장관의 언급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미 국무부 전문에는 이란 핵 프로그램을 비롯한 세계적인 현안은 물론 각국 지도자에 대한 평가와 유엔 사무총장 등 유엔 관리들에 대한 사실상 스파이 활동 지시 등 크고 작은 정보들이 모두 망라돼 있기 때문이다.

서버 제공한 아마존닷컴 서비스 중단

어산지는 시사주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의 사임을 촉구했다. 그러나 로버트 기브스 미 백악관 대변인은 오히려 어산지의 요구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동시에 미 국무부는 앞서 이라크 및 아프간 기밀문서 공개 때 국방부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직원들에게 외교전문을 보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내부 단속에 급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디지털 외교’를 강조하며 직원들의 트위터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사용을 장려하던 국무부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관료적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위키리크스에 서버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아마존닷컴은 미 언론과 정치권 등의 압력에 못이겨 지난 1일 관련 서비스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조 리버맨 미 상원 국토안보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아마존의 이번 결정은 옳은 것이며, 위키리크스가 불법적으로 획득한 기밀들을 폭로하기 위해 이용하는 다른 기업들에 모범적인 기준이 돼야 한다”면서 “위키리크스에 서버를 제공하는 모든 기업은 즉각 그들과의 관계를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어산지에 대한 압박도 본격화하고 있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는 지난달 말 어산지에 대한 수배령을 회원국가들에 전달했다. 인터폴이 그에 대한 수배령을 내린 것은 스웨덴 법원이 지난 8월 어산지가 스웨덴에 머무는 동안 일어난 성폭행 연루 혐의에 대한 조사를 위해 그의 체포 영장을 발부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 검찰은 당초 어산지에 대한 성폭행 혐의를 자체적으로 기각했지만 이후 다시 제기하는 등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위키리크스의 외교전문 공개로 위기에 처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11월 29일 국무부 청사에서 외교전문 공개에 대한 유감 입장을 밝히고 있다. (워싱턴, AFP연합뉴스)


일부 미 의원들은 금지된 ‘암살’을 공공연하게 입에 올리며 어산지를 압박하고 있다. 마이크 허커비 전 공화당 대선 후보(전 아칸소 주지사)는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 유출은 반역죄에 해당되며 어산지를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CNN이 전했다.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의 고문인 톰 플래너건도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어산지는) 암살돼야 하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무인비행기를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어산지가 지난 4월 초 이라크 주둔 미군이 아파치 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해 로이터 기자 2명을 포함해 민간인 10여명이 숨진 동영상을 공개했을 때만 해도 어산지에 대한 적대감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7월 이라크 전쟁 일지를 공개하면서부터 미 정부는 위키리크스와 어산지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면서 기밀문서 공개가 간첩법에 저촉된다는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왔다.

일부 정치인들 ‘암살’까지 거론

향후 관심은 미 정부가 어산지를 간첩법(Espionage Act)을 적용해 미국 법정에 세울 것인가 하는 점에 모아진다. 실제로 미 법무부와 국무부, 국방부의 법률고문들은 위키리크스의 행위에 대해 간첩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 법리 검토에 들어갔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간첩죄 적용이 가능한지와 적용한다면 누구에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워싱턴포스트가 지난달 30일 전했다. 피터 킹 하원의원의 경우 어산지에 대해 간첩죄를 적용할 것과 위키리크스를 테러단체로 지정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7년 제정된 간첩법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수정헌법 1조를 광범위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연방대법원 판례 때문에 비밀문건 유출 사건에 적용할 경우 논란이 일 수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지적했다. 간첩법이 언론·출판에 적용된 사례는 없다. 간첩사건 관련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아온 변호사 플레이토 카케리스는 “어산지의 행위는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향후 법리 공방의 초점 가운데 하나가 어산지가 언론인인가 하는 점에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어산지는 스스로 ‘십자가를 진 언론인’임을 자처하고 있다. 어산지는 미 ABC 방송과의 이메일을 통해 “거짓과 부패, 바레인에서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살인적인 지도력을 폭로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사주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는 “비밀을 통해 부당한 행위를 감추려는 조직을 타깃으로 한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장애는 어산지를 미국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터폴이 수배령을 내림에 따라 영국에 머물고 있는 어산지의 체포는 시간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경우 어산지는 스웨덴 법정에서 성폭행 혐의와 관련한 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스웨덴이 미국에 어산지의 신병을 인도할지는 별개 문제라고 AP통신은 지적했다. 간첩법은 최고 사형을 구형할 수 있지만 사형제를 폐지한 국가로서는 종종 사형을 우려해 피고인 신병 인도를 거절하기도 한다. 스웨덴은 사형제를 폐지한 국가다. 듀크대의 마이클 티거 명예교수는 AP통신에 “ 미 정부의 대응은 부풀려졌다”면서 “수정헌법 1조는 가끔 외교관의 정보수집에 대한 공개가 정부를 창피하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