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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제3세계의 영웅 vs 잔인한 독재자(2011.09.06/주간경향 941호)


1969년 9월 1일 27세의 나이에 쿠데타에 성공해 42년간 철권통치를 해오다 국민들에 의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69)만큼 다양하면서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 현대 지도자도 드물다. 카다피는 야누스의 이미지를 지닌 독특한 지도자로 항상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는 제3세계에서 반미·반식민주의의 상징이었다. 카다피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대내적으로는 직접민주주의와 이슬람적 요소를 결합한 ‘인민권력’이라는 독특한 체제 실험을 통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펼치고, 대외적으로는 반식민주의·반서방 노선을 걸으면서 제3세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반면 서방세계로부터는 테러 후원자이자 잔인한 독재자로 지탄받았다.
 카다피의 트레이드 마크는 장황한 연설과 여성에 대한 편력, 독특한 복장과 베두인 텐트로 대표되는 기행 등이다. 이 같은 그의 특징은 다분히 자신의 성격과 경험에 의한 피해의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소품이 됐다.

기행과 독특한 복장, 부정적 이미지 키워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내전이 한창이던 지난 4월 10일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내전 종식에 대한 논의를 마친 뒤 거주지인 바브 알 아지지야 밖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트리폴리/로이터연합뉴스


 이란 출신의 망명작가이자 보수 논객인 아미르 타헤리(69)는 1970년 9월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의 장례식에서 직접 본 카다피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2009년 더 타임스에 쓴 글을 가디언이 8월 23일 소개한 것이다. “카이로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나는 리비아 장교들과 웅크리고 있는 카다피를 보았다. 그들은 TV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가슴을 치거나 억제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카메라가 멈추자 눈물은 사라졌다. 대령(카다피)과 그의 수행단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우리와 악수를 나눴다.” 당시 카다피는 28살로, 쿠데타에 성공한 지 불과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카다피는 나세르의 범아랍주의와 반식민주의 노선을 추종했으며, 스스로 그의 분신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세르 장례식에서 보인 그의 행동은 전형적인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카다피의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파리를 방문했을 때 카다피는 자신을 프랑스 절대왕정의 대표적인 군주인 루이 14세의 찬미자로 소개하고, 2005년 11월 이슬람 이민자들이 일으킨 파리 폭동에 대한 프랑스의 잘못된 대응을 꼬집었다. 카다피는 “그들(프랑스)은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 소처럼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우리를 외곽에 살도록 내버려뒀으며 우리가 권리를 요구하자 경찰이 때렸다”고 말한 것으로 가디언은 전했다.

 2009년 유엔총회 연설은 그의 기행의 종결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96분간의 연설을 통해 뉴욕까지 오면서 겪은 비행시차에 대한 불만과 같은 사사로운 일로부터 당시 만연하던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불만뿐만 아니라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암살은 물론 유엔본부를 리비아로 옮겨야 한다는 등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단연 압권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카다피는 안보리를 “테러이사회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엔헌장 사본을 찢어버렸다.

전통 복장 차림의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2009년 9월 23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총회에서 연설하던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뉴욕/로이터연합뉴스

카다피의 살인적이고 소름 끼치게 하고 오만한 측면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카다피는 2003년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 당시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미국의 팬암기 폭파사건으로 270명이 죽은 사건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카다피는 처음엔 과거 일은 묻어야 할 때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집요한 압박으로 궁지에 몰린 그는 테이블을 치면서 리비아도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적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합의에 도달할 수 있길 희망한다. 그 합의는 리비아와 미국이 동시에 보상기금 마련에 기여하는 것”이라면서, 그 이유로 1986년 미국의 카다피 근거지에 대한 공습으로 숨진 리비아인에 대한 보상을 들었다. 당시 공습으로 카다피의 어린 딸을 비롯해 100여명이 숨졌다. 카다피는 “딸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으로 얼마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미국인 희생자가 100만 달러를 받는다면 딸은 수억 달러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 독자위성통신체제 구축 

 하지만 카다피의 이 같은 모습과 달리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카메룬의 언론인 장 폴 푸갈라가 8월 21일 디시던트보이스에 기고한 글 ‘왜 서방은 카다피의 몰락을 원하는가’는 이를 잘 보여준다. 푸갈라의 글은 제3세계가 카다피를 바라보는 시각을 대변한다.
 우선 카다피가 추진한 독자적 위성 커뮤니케이션 구축작업이다. 아프리카를 서방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카다피가 추진한 대표 사례다. 카디피는 1992년 아프리카 45개 국가와 연합해 RASCOM이라는 독자적인 위성통신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해 2007년 12월 26일 완성했다. 구축 비용은 약 4억 달러가 들었다. 리비아가 3억 달러를 충당하고, 아프리카개발은행이 5000만 달러를, 서아프리카개발은행이 2700만 달러를 각각 투입했다. 그 결과 매년 5억 달러에 달하는 유럽의 정보통신위성 인텔샛 사용료를 절약할 수 있었다.

만델라, 인종주의자 백인정권 항거 투장 지원 보답 방문

 또 하나는 유엔의 리비아에 대한 여행제한 조치를 거부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다. 남아공의 인종주의자 백인정권에 대한 투쟁 때문에 27년 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만델라는 유엔의 여행제한 조치를 무시하고 1997년 10월 23일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로 날아갔다. 카다피가 자신의 투쟁을 적극 지원해준 보답이었다. 당시는 유엔이 내린 리비아에 대한 여행제한 조치가 적용되던 때로 5년 동안 아무도 직접 리비아로 날아갈 수 없었다. 대부분 튀니지의 제르바까지 항공편으로 온 뒤 8시간이나 자동차를 이용해 트리폴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혹은 몰타에서 배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델라는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환영받지 못하는 여행이라고 만류하는 데도 불구하고 리비아행을 강행했다. 어느 누구도 다른 나라에 무엇을 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어제까지 우리 적의 친구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뻔뻔스럽게도 나의 형제 카다피를 방문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은 과거의 우리 친구를 잊고 배은망덕하라고 조언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남아공 백인정권은 서방국가에겐 보호해야 할 형제였지만 만델라는 이 때문에 위험한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혔다. 미 의회가 만델라를 테러리스트 블랙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은 2008년 7월 2일이었다. 푸갈라는 미국이 테러리스트 명단이 멍청한 짓이라고 깨달아서가 아니라 만델라의 90번째 생일(7월18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군복 차림의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1999년 9월 7일 트리폴리에서 열린 군사퍼레이드 도중 군인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트리폴리/로이터연합뉴스
 

 많은 혁명가들이 독재자로 전락하듯 카다피도 그렇게 변했으며, 독재자들과 비슷한 말로를 걷고 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있는 카다피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같은 최후를 맞을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카다피 42년 통치시대가 종말을 고했다는 점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의 북아프리카 전문가인 사드 제바르는 카다피의 42년 통치를 실패로 규정했다. 그는 8월 22일 AP통신에 “카다피는 이상국가를 건설하기를 갈망했다”면서 “그는 보통국가의 요소조차 하나도 구현하지 못한 채 끝났다. 그가 주창한 ‘인민권력’ 개념은 혁명가를 부의 축재자로 전락하게 만든, 가장 쓸데없는 시스템으로 판명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