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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여적

[여적] ‘돼지 같다’는 비유(210320)

2008년 미국 대선 두 달 전, 난데없이 ‘돼지 립스틱’ 논란이 벌어졌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돼지 입술에 립스틱을 발라도 돼지는 돼지”라고 한 말이 발단이었다. 공화당은 첫 여성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을 겨냥한 성차별적 비방이라며 발끈했다. 페일린은 며칠 전 수락연설에서 자신을 자식 뒷바라지에 여념 없는 하키맘에 비유하며 “하키맘과 투견의 차이는 립스틱을 발랐다는 것”이라고 했다. 오바마는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이 강조하는 ‘변화’가 소용없다는 의미로 사용했다며 사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매케인도 한 해 전 민주당 경선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의 건강보험 계획을 비판하면서 똑같은 비유를 했기 때문이다. 미 정가에서 자주 쓰이는 ‘돼지 입술에 립스틱’이라는 표현은 우리 속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나’와 같은 의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돼지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돼지는 탐욕과 더러움, 추함, 하찮음을 상징한다. 소크라테스의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라’는 말보다 돼지의 탐욕을 잘 보여주는 말은 없을 터이다. 우리 속담 속 돼지도 마찬가지다. ‘돼지를 그려서 붙이겠다’는 속담은 탐욕을, ‘돼지는 흐린 물을 좋아한다’는 속담은 더러움을 표현한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는 값어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물도 아무 소용 없음을 뜻한다. 돼지는 재산이나 복의 상징이기도 하다. ‘돼지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돼지꿈을 최상의 길조로 여긴다.

 

현실에서 ‘돼지 같다’는 비유는 곧잘 역풍을 맞는다. 비하와 성차별적 의미가 내포돼 있어 잘못 말했다가는 패가망신하기 일쑤다. 몇 년 전 고위 공무원도 ‘국민은 개돼지’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가 혼쭐나지 않았던가. 일본 도쿄 올림픽 개·폐막식 총괄 담당자가 여성 외모 비하 문제로 지난 18일 사퇴했다. 뚱뚱한 여성 연예인을 돼지로 분장시켜 익살스럽게 연기하게 하려는 개막식 안이 뒤늦게 드러난 탓이다. 그런데도 정작 여성 연예인은 당당하다. “나 자신은 이런 체형으로 행복하다. 각자의 개성과 생각을 존중하고 서로 인정해 즐겁고 풍요로운 세상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어떤 이유로도 여성 외모 비하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