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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여적

[여적] 굿바이 올브라이트(220325)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은 유리천장을 깬 대표적 인물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 2기(1997~2001) 국무장관을 지낸 그는 여성으로 처음 그 자리에 올랐다. 초대 토머스 제퍼슨부터 현직 앤서니 블링컨까지 역대 71명 국무장관 중 여성은 3명이다. 상원 인준 표결에서 찬성 99, 반대 0으로 초당적 지지를 받았다. 올브라이트 덕분에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도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올브라이트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핀(브로치) 외교’다. 유엔대사(1993~1997)와 국무장관 시절 그는 핀으로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크렘린궁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에 그는 귀·눈·입을 막은 원숭이 핀을 달고 나왔다. 이유를 묻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당신의 체첸 정책 때문”이라고 하자 푸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쁜 것은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속담으로 체첸 전쟁을 비판한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2016년 대선에 출마하자 올브라이트는 깨진 유리가 천장에 매달린 형상의 핀을 착용했다. 클린턴의 도전이 유리천장을 완전히 부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표현이었다. 도널드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는 이민자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핀을 달았다. 체코 태생으로 나치와 공산주의자의 폭압을 피해 영국과 미국으로 두 번 이민한 난민 출신이라는 정체성이 스며 있었다. 소셜미디어가 없던 시절 핀은 메시지 전달수단이었다.

올브라이트는 북·미관계에서도 특별한 업적을 남겼다. ‘페리 프로세스’로 알려진 대북 포용정책을 진두지휘하며 대북 경제제재 완화를 실행에 옮겼다. 북한도 화답해 양국 간 해빙무드가 조성됐다. 2000년 10월 조명록 북한 특사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적대관계 종식·평화보장 체제 수립 등을 담은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함께 발표했다. 올브라이트는 곧바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타진했다. 만약 2000년 미 대선에서 앨 고어가 이겨 북·미 수교가 이뤄졌다면 지금의 한반도 정세는 달라졌을 것이다. 올브라이트가 23일 암으로 타계했다. 그리고 북한은 다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며 레드라인을 넘었다. 올브라이트와 같은 협상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