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무기가 쓴 칼럼/아침을 열며

아침을열며15/‘거대한 체스판’에 마주한 푸틴과 오바마

지미 카터 미국 행정부 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1997년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을 펴냈다. 브레진스키가 체스판에 비유한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이다. 옛 소련 붕괴 후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이 향후 헤게모니에 도전받지 않고 유라시아 대륙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훈수를 두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옛 소련 지역인 러시아와 그 인접지역을 블랙홀로 불렀다.

그로부터 17년 후, 브레진스키가 블랙홀이라고 부른 지역의 우크라이나가 말 그대로 모든 국제뉴스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발단은 지난해 11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 추진하던 무역협정 체결을 러시아의 압력에 밀려 중단한 일이었다. 이후 친유럽계는 ‘유로마이단 시위’를 주도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쫓아냄으로써 2004년 오렌지혁명에 이어 또 하나의 혁명을 이뤄냈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었다. 혁명 후 우크라이나 남부 크리미아 자치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계와 반러시아계의 혼란상황을 틈타 러시아가 끼어들었다. 급기야 러시아 의회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여 우크라이나 안에서의 군사력 사용을 승인했다. 푸틴이 무력 사용으로 내세운 명분은 자국민 보호 및 크리미아 자치공화국 내 군인 보호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에 맞서 전군에 전투태세를 내렸다. 최악의 경우 두 나라 간 무력 충돌 상황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거대한 체스판의 주인공은 푸틴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두 사람이 마주한 체스판을 상상하면 마치 냉전시대가 도래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브레진스키가 책을 쓸 당시 푸틴과 오바마는 무명 정치인에 다름없었다. 옛 소련 첩보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인 푸틴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을 보위하던 행정실 실장이었으며, 오바마는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었다. 냉전 이후 정치인인 두 사람이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급기야 거대한 체스판에서 마주하리라고 브레진스키는 꿈조차 꾸지 못했을 터이다.

러시아가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해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우크라이나 크리미아 자치공화국의 세바스토폴 외곽에서 1일(현지시간) 한 우크라이나 남성이 총을 든 러시아 군인들 앞에서 상의를 벗고 맨몸으로 선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세바스토폴 _ AP연합뉴스


이 체스판에서 주도권을 쥔 이는 푸틴이다. 그는 불리하게 전개되던 상황을 막판에 반전시켜 일단 게임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반면 오바마는 불과 열흘 전(지난달 19일)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 사태를 ‘냉전의 체스판’으로 보지 않은 채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결국 게임은 푸틴이 두는 수에 오바마가 끌려가는 판으로 정리된 것이다. 푸틴의 손에는 쓸 수 있는 수가 많다. 천연가스 공급 중단과 원조 철회, 우크라이나에 대한 채권을 서방이 책임지게 하는 방법 등은 군사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우크라이나의 목줄을 조여 오바마를 무력화할 수 있는 카드들이다.

오바마가 처한 상황은 여의치 않다. 그동안 시리아 사태나 이란 핵문제에서도 푸틴에게 끌려다녔던 그다. 2009년 취임 후 러시아와의 관계 재설정(리셋)을 선언한 그로서는 러시아와의 지정학적 체스 게임을 피하는 것을 중요한 대외정책 목표로 삼았다. 미국의 보수 국제정치학자 월터 러셀 미드는 이를 시리아 문제에서 이란의 개입을 이란 핵문제와 별도로 취급하려는 오바마의 태도로 설명한다. 연장선에서 오바마는 할 수만 있다면 크리미아의 러시아 병합을 이보다 더 중요한 러시아 아젠다와 분리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는 국내외적으로 기존 게임의 법칙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 내몰려 있다. 이런 점에서 푸틴의 도박은 오바마의 도박이기도 하다. 푸틴의 도박에 잘못 대응하다가는 최대 정치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전쟁에 말려드는 일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현실화할 경우 그 또한 아프간 및 이라크전쟁을 일으킨 전임자 조지 W 부시와 같은 멍에를 뒤집어쓰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푸틴이 이 체스 게임에서 바라는 게 무엇일까. 크리미아 반도에 혼란을 초래해 결국 러시아에 편입하는 것일까. 아니면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일까. 그것은 옛 소련 해체로 실추된 강대국의 이미지를 되살리려는 그의 목표를 이루는 일이기도 하다. 오바마에겐 반전의 카드가 있을까. 그토록 강조해온 러시아와의 리셋을 다시 리셋할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푸틴의 게임에 오바마가 어떤 대응을 하느냐에 크리미아 반도가 우크라이나의 발칸 반도가 될 것인지는 물론 오바마 자신의 정치 운명도 달려 있다고 하겠다.


조찬제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