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무기가 쓴 칼럼/마감후

마감후11/첫 관타나모 민간재판 승자는?

284 대 1. 

지난 17일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에 대한 첫 민간재판으로 주목받은 1998년 케냐 및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폭탄테러 사건 용의자 아메드 가일라니에 대해 내린 뉴욕 연방법원 배심원단의 평결 결과다. 285개 혐의 가운데 단 하나의 유죄 평결.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미 정부(검찰) 측의 완패라 할 수 있다. 
민간재판 찬반론자들은 아전인수식 잣대로 손익 계산에 분주하다. 모두 284라는 숫자에 주목하지만 해석은 다르다. 찬성론자들은 미 사법제도의 승리로 본다. 반대론자들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테러 용의자 정책의 실패로 규정한다. 
한편에서는 뉴욕에서 대기 중인 9·11 테러 주모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의 재판에 미칠 영향에 주목한다. 전체적으로는 가일라니 평결 이후 미국의 사법체제가 시험받고 있는 형국이다.

이번 평결이 민간재판 찬반론자 어느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지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미 주류 언론들은 1개의 유죄 평결보다는 284개의 무죄 평결에 주목한 반대론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무게를 둔다. 배심원단은 224명의 인명을 앗아가고 5000명에 달하는 부상자를 낳은 테러 사건 용의자에게 씌워진 살인 및 살인모의 관련 혐의는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테러 용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줬네, 향후 재판에 나쁜 신호를 보낼 수 있겠네 라는 불만과 함께 민간재판 폐지 요구가 나올 만하다. 




1개의 유죄 평결만으로도 가일라니가 최소 20년형에서 가석방이 없는 무기형까지 가능하다는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마당이니 공화당 등 민간재판 반대론자들은 기세등등하다. 이 참에 군사재판을 통해 테러 용의자들을 영원히 감금시키겠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흥분할 일은 아니다. 보통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284개 혐의에 대해 무죄 평결을 내린 이유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민간재판 반대론자들이 간과, 아니 무시하고 있는 것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모든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한다는 이 원칙은 인권보호의 가장 기본이다. 힘없는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많은 미국민들은 애초부터 테러 용의자 가슴에 유죄라는 주홍글자를 박아놓았다. 지난해 이맘 때 모하메드를 민간법정에 세우기로 결정한 에릭 홀더 법무장관조차 “실패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라며 유죄선고에 대한 확신을 드러낸 바 있다. 

가일라니에 대한 평결은 유죄로 추정한 모든 미국민들에 대한 경종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일라니 평결에 주목해야 할 점은 고문에 의한 증거는 채택될 수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에 있다. 이를 계기로 물밑에 있던 고문 문제도 재부상했다. 
제네바협정이 금지한 테러 용의자에 대한 고문은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승인으로 자행됐다. 그후 테러 용의자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해외에서 운영한 비밀감옥과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갖은 고문을 당했다. 모하메드는 물고문만 183차례나 겪었다. 
그럼에도 부시 대통령은 이달 초 출간된 회고록 <결정의 순간>에서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부시의 고문’이 남긴 부정적인 유산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문을 한 자는 자유롭게 누비는데, 그 대가로 테러 희생자 가족들이 치르는 불합리성도 하나다. 

검찰 측도 유죄 입증에 애를 먹고 있다. 애써 확보한 증거조차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가일라니 평결의 승자는 가일라니도, 민간법정 찬반론자도 아닌 고문을 승인한 부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