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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아침을 열며

아침을열며8/내부 고발자의 힘

조찬제 국제부장

한 건의 폭로가 다시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지난 3일(현지시간) 웹사이트에 띄운, 조세 피난처에 관한 탐사보도다. 협회는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와 케이맨군도 등 유명 조세 피난처에 있는 유령회사 12만2000여개와 170여개국의 정치인·기업인·재력가 등 약 13만명이 차명 임원이나 익명 소유 방식으로 유령회사를 차리거나 거래한 사실을 공개했다. 탈세와 돈세탁 등 불법·탈법의 온상으로 불리는 조세 피난처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1차로 명단이 공개된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캐나다,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 몽골 등의 해당자들은 불법행위는 없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해당국에서는 탈세와 돈세탁 등 불법행위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한국 국세청을 비롯한 독일, 그리스, 캐나다, 미국의 관련 당국은 관련자에 대한 조사 입장을 밝히며 협회 측에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 현재까지 실명이 공개된 명단은 전체 약 13만명에 견줘보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협회 측이 연말 또는 내년까지 속보를 내기로 함에 따라 파장은 앞으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조세 피난처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번 탐사보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대부분의 세계적인 특종이 그렇듯 익명의 내부고발자의 제보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2011년 어느 날, 호주에서 활동해온 언론인 제러드 라일 집에 우편물이 배달됐다. 속에는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가 들어 있었다. 우편물이 라일에게 배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라일은 우편물을 받기 전까지 3년 동안 호주 역사상 최악의 기업사기·조세회피 사건인 ‘파이어파워 스캔들’을 끈질기게 추적해왔다고 한다. 어쩌면 조세 피난처 정보를 담은 하드 드라이브는 파이어파워 스캔들의 실상을 파헤쳐온 그를 위해 신이 준 선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료는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었다. 원석을 다듬어 보물로 만드는 일은 오롯이 라일의 몫이었다. 자료를 받은 라일은 “직감적으로 엄청난 정보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AFP통신에 밝혔다. 흥분은 잠시뿐이었다. 기술적인 한계에 따른 좌절감이 그를 엄습했다. “정보들은 거의 읽을 수 없었다. 컴퓨터가 갑자기 멈춰버리기 일쑤였다. 세계 각국의 많은 이름이 있었는데, 관심 밖의 사람들이었다. 기자라면 누구라도 그렇듯 인터넷과 구글을 통해 그 사람들이 누군지 확인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그는 ‘퍼즐 맞추기’에 나섰다. 하지만 자료는 너무나 방대했다.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는 260기가바이트 규모였다. 이는 책 50만권에 해당하는 정보량이다. 2010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비리폭로 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의 미국 국무부 외교전문 25만여건보다 160배 이상 많다고 한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미친 그가 떠올린 것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였다. 미국의 대표 비영리 탐사언론인 조직인 공직청렴센터(CPI)가 부패와 권력의 책임 등을 파헤치기 위해 1997년 설립한 조직이다. 60여개국 언론인 160여명이 소속돼 있다. 라일은 보물을 찾기 위해 워싱턴으로 와 협회 책임자가 됐다. 2011년 9월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46개국 언론인 86명이 정보 분석작업에 동참했다. 호주의 한 소프트웨어 회사는 자료의 정보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개발했다. 복잡한 퍼즐 맞추기에 돌입한 지 15개월 만에 첫 결과물이 나왔다. 일일이 관련자 확인작업을 거친 덕분에 폭로의 파급력은 컸다.


조세피난처에 재산을 은닉해 온 유명 인사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이고르 슈발로프 러시아 제1부총리 부인 올가 슈발로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독재자의 장녀 마리아 이멜다 마르코스 마노톡, 바야르트소그트 상가잡 몽골 국회 부의장, 날리니 타비신 태국 국제무역대표부 대표, 짐바브웨 사업가 빌리 로텐바크,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책 <링컨의 얼굴> 저자이자 은행재벌인 멜런 가문의 제임스 멜런, 스페인 최고 미술품 수집가인 카르멘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부인.


조세 피난처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경위를 재구성한 것은 용기있는 내부고발자 덕분에 언론이 권력의 비리와 각종 부패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971년 펜타곤 페이퍼를 뉴욕타임스에 제공한 대니얼 엘스버그가 있었기에 세계는 베트남 전쟁의 실체를 알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2010년엔 위키리크스에 미 국무부 외교전문 25만여건을 제공한 브래들리 매닝이 있었기에 미국의 오만함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내부고발자들의 용기와 희생 덕분에 언론은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부고발의 대가는 가혹했다. 엘스버그는 이미 시련을 겪었고, 매닝 앞에는 커다란 시련이 놓여 있다. 조세 피난처 정보를 제공한 익명의 내부고발자는 이 같은 선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글을 쓰는 7일은 마침 ‘신문의 날’이다. 언론의 역할을 일깨워준 수많은 내부고발자들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더 많은 내부고발자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이 내부고발을 토대로 비리를 공개하고, 정부가 이를 바탕으로 조사해 관련자를 처벌하는 선순환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하지만 조직 비리를 폭로한 내부고발자가 사회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부당한 징계를 받고, 법과 제도는 갖춰져 있지만 이를 비웃는 게 현실이다. 내부고발자가 보호받는 현실, 언론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