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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아침을 열며

아침을열며7/‘제로 다크 서티’와 ‘아르고’

조찬제 국제부장

일주일 전에 끝난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작품상 발표였다. 명배우 잭 니컬슨이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조연이었다. 주연은 미국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였다. 니컬슨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백악관에서 파티 중이던 오바마가 무대 뒤 대형 화면에 등장했다. “올해 작품상 발표에 도움을 줄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문을 연 오바마는 “9편의 영화는 우리를 웃게도 울게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주먹을 조금 더 힘껏 쥐게 한다. 그들은 사랑이 모든 차별을 견디게 하고 우리의 삶을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변화시키고, 만약 우리가 열심히 버텨 싸우고 용기를 찾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것이라는 점을 일깨운다”고 말했다. 진행을 넘겨받은 니컬슨이 후보작 9편을 소개하자 작품상 이름이 든 봉투가 오바마에게 전달됐다. “작품상은 <아르고>.” 퍼스트레이디의 깜짝 작품상 발표, 역대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이보다 더 극적인 장면은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퍼스트레이디의 카메오 등장은 올해 아카데미상이 정치적이라는 논란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아카데미상의 ‘정치 논란’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올해 후보작들은 유독 정치색이 강했다. 작품상 후보작 9편 가운데 2편이 더욱 그랬다. <아르고>와 <제로 다크 서티>이다. <아르고>는 1979년 이란 주재 미국인 대사관 인질사건을, <제로 다크 서티>는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암살작전을 각각 다뤘다. 두 영화는 작품상을 비롯해 각각 5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성적은 엇갈렸다. <아르고>는 작품상·각색상·편집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고, <제로 다크 서티>는 음향편집상을 받았다.

<아르고>의 작품상 수상 소식은 반향이 컸다. 시상식 전부터 <아르고> 대항 영화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이란의 비난은 예상대로 격했다.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반이란 영화를 만들어 상을 주는 것은 정치와 예술이 뒤섞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무함마드 호세이니 문화부 장관은 “<아르고>는 미국의 일방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반이란 영화”라고 꼬집었다. 반관영 파르스 통신은 “<아르고>는 유대인들이 자금줄인 워너브러더스가 만든 반이란 영화”라고, 국영 TV는 “시상식은 전례없는 정치 쇼”라고 각각 혹평했다.

영화 &amp;amp;amp;lt;아르고&amp;amp;amp;gt; 장면들 (경향신문DB)

<아르고>가 미국 시각에서 사건을 다뤄 이란의 비판을 받았다면 <제로 다크 서티>는 고문 때문에 미국 안에서 논란이 됐다.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억류한 사람들을 고문해 빈 라덴에 대한 정보를 얻는 장면이 문제였다. 논란은 미 상원의 영화 제작자와 그들과 접촉한 CIA 요원들에 대한 조사 사태로 번졌다. 민주당의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 정보위원회 위원장마저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급기야 캐스린 비글로 감독은 반박글을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실었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묘사는 승인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안다. 만약 승인을 받아야 한다면 화가는 비인간적 행위를 그릴 수 없고, 작가는 그들에 대해 쓸 수 없고, 영화감독은 시대의 민감한 주제를 다룰 수 없다.”

<제로 다크 서티> 고문 논란의 불똥은 존 브레넌 CIA 국장 지명자에게로 튀었다. 브레넌은 오바마 1기 백악관에서 대테러 보좌관으로 무인비행기를 활용한 표적살해 논란의 장본인으로 꼽혀온 인물이다. 2008년 오바마에 의해 CIA 국장 후보에도 올랐으나 전임 조지 부시 행정부가 고문을 승인했다는 논란 때문에 배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브레넌을 대테러 보좌관에 이어 이번엔 CIA 국장으로 지명한 것이다. 하지만 상원은 그의 인준을 늦추고 있다. 미 행정부가 무인비행기 사용에 관한 극비 문서자료를 의회에 제출하지 않은 데 대한 반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말 미국 정부가 알카에다 연계 의심 용의자라면 미국인이라도 사살할 수 있다는 내용의 정부 내부 문건이 언론에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이 때문에 의회는 행정부에 자세한 무인비행기 활용 프로그램 자료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9·11 테러 이후 비대해진 행정부 탓에 견제와 균형이라는 삼권분립 원칙이 훼손된 데 대한 불만도 깔려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말처럼 영화에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리수이다. 의도적인 사실 왜곡은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가공성과 오락성은 영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아르고>가 CIA 본부 로비를 촬영장소로 제공받았지만 <제로 다크 서티>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건 시상식 다음날 미 의회가 <제로 다크 서티> 제작자와 CIA 간의 접촉에 대한 조사를 중단하겠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이다. 고문 논란이 <제로 다크 서티>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작품상 수상 가능성을 낮추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은 없을까. 또 2010년 <허트 로커>로 여성 첫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비글로가 감독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데도 영향을 준 건 아닐까.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제로 다크 서티>는 7일 개봉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