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이 코로나19로 한창 고통받던 지난 4월, 영국발 유쾌한 이벤트가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2차 세계대전 참전 100세 퇴역 대위 톰 무어의 ‘뒷마당 행진’이었다. 100번째 생일(4월30일) 때까지 집 뒷마당을 하루에 10바퀴씩 100바퀴(총 2500m)를 도는 것이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의 최전선에 있는 공공의료서비스(NHS) 간호사들을 돕기 위한 모금행사로 진행됐다. 최초 목표액은 1000파운드(약 151만원). 하지만 최종 모금액은 3280만파운드(약 496억원)나 됐다. 평범한 노인의 용기 있고 따뜻한 도전이 만든 기적이었다. 100번째 생일날, 여왕과 총리는 물론 전 세계에서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축하 카드만 150만장이 넘었다. 공군은 공중 분열식을 두 차례나 하며 축하했다. 기사 작위도 받았다. ‘명예 대령’으로 진급도 했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명예 주장’도 됐다. 행진은 끝났지만 감동은 계속되고 있다. 그에게 자극받은 ‘자선모금 동참’ 열풍 덕분이다. 척추가 둘로 갈라진 6세 소년, 두 다리가 마비된 5세 소년, 뇌성마비 9세 소년, 102세 노인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감동의 발걸음을 힘차게 뗐다. 100세 영웅 ‘캡틴 톰’은 이렇게 탄생했다.

지난 10일 캡틴 톰과 동갑인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 타계했다. 그의 사후 서울현충원이냐, 대전현충원이냐는 ‘장지 논란’이 재연됐다. 이미 유가족과 정부가 대전으로 결정한 터였다. 그가 버젓이 살아 있을 때부터 벌어진 장지 논란은 눈꼴사나웠다. 보수 진영이 이용할 것을 알면서도 묵인해 논란을 부추긴 책임이 그에게도 있다. 더욱이 ‘친일파냐, 구국 영웅이냐’는 논란은 내버려두더라도 그의 말년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장지 논란은 전두환 시절의 부정축재 논란, 이명박 정부 때 명예원수 추대 논란과 함께 오점으로 남아 있다.

백선엽과 캡틴 톰은 '영웅'이다. 백선엽은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했다. 톰은 코로나19 시련기에 희망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대위와 대장 계급장만큼이나 달랐다. 백선엽은 평생 명예와 부귀영화를 누렸다. 반면 캡틴 톰은 많은 동시대인처럼 평범한 삶을 살았다. 인생 마지막 챕터도 마찬가지다. 백선엽은 논란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캡틴 톰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시련을 맞아 불굴의 용기를 보여준 덕분에 진정한 영웅이 됐다. 그리고 여전히 건재하다. 흔히 한 인간의 평판은 인생 마지막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백선엽은 ‘화려한 과거’를 먹고살았다. 캡틴 톰은 국가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줬다. 자선모금 행사를 한 것도 아플 때마다 NHS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는 최전선에서 싸웠고, 국민들은 뒤에서 지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의료진이 최전선에 서 있다. 도움을 받은 우리 세대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

2017년 <처음 늙어보는 사람들에게>라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저자는 40대 초반에 파킨슨병에 걸린 미국 정치평론가 마이클 킨슬리(69)다. 남들보다 먼저 늙어버린 그가 20여년간 노화와 죽음에 대해 통찰한 내용을 2016년에 담은 것이다. 자신과 같은 베이비부머들이 생의 마지막에 과거 ‘명성’보다 사후의 ‘평판’을 위해 살기를 바라며 3가지를 제언했다. 혼자만의 울타리에 갇히지 말자.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공동체와 더불어 함께 행동하자.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자. 눈길을 끈 대목은 또 있다. 로버트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1916~2009), 래리 엘리슨 오러클 회장(1944~), 앨 고어 전 부통령(1948~)에 대한 촌철살인 같은 평이었다. 그에게 맥나마라는 ‘장수라는 선물을 이용해 과거를 보상받으려는 사람’이었다. 엘리슨은 ‘돈으로 장수를 사려 한 사람’이었다. 고어는 ‘노인의 생각을 가진 청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백선엽은 어떤 인물일까. 맥나마라에 가깝지 않을까. 캡틴 톰은 고어와 반대가 아닐까. ‘청년의 생각을 가진 노인’ 말이다.

캡틴 톰은 ‘아름다운 노년’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그는 과거의 명성에 갇힌, 박제화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래서 인생 막판에 '기적'을 만들 수 있었다. 그가 킨슬리의 제언을 알았던 걸까. ‘우리에게는 왜 캡틴 톰처럼 귀감이 되는 노인이 드물까.’ ‘이렇게 유쾌하고 멋진 삶을 살고 있는 캡틴 톰을 백선엽이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15일 대전현충원에 묻힌 백선엽을 보며 든 상념들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더불어 캡틴 톰의 소소하고도 유쾌한 인생이 이어지길 기원한다.


Posted by emu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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