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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경향신문 사설

[사설] 베를린 소녀상 철거 중단, 시민단체가 견인한 사필귀정(201015)

독일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 일단 철거 위기를 넘겼다. 해당 지자체인 베를린 미테구(區)가 철거 시한을 하루 앞두고 내린 전격적인 보류 결정 덕분이다. 자칫 한·일 간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사안이 일단 봉합돼 다행이다. 무엇보다도 소녀상 철거 보류는 일본 측의 전방위 압박에 맞서 오롯이 시민단체의 힘으로 이뤄낸 성취라는 데 의미가 크다.

베를린 소녀상은 현지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가 주도해 지난달 말 설치됐다. 미테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소녀상이 전시 여성인권 문제라는 점을 인정해 지난해 7월 허가했다. 하지만 미테구가 일본 정부와 일본인의 전방위 압박을 받은 독일 당국에 굴복해 설치 열흘 만에 철거 명령을 내리면서 논란이 됐다. 코리아협의회는 다른 시민단체와 연계해 철거명령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내는 등 철거 반대 운동을 벌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도 동참했고, 좌파 연립정부를 구성 중인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등도 지자체의 철거 결정을 비판했다. 결국 미테구는 반대 여론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단체가 힘을 얻은 것은 독일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 덕분이다. 독일은 같은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과 달리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왔다. 이런 그들에게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희생은 한·일 간 분쟁이 아니라 전시 성폭력의 너무나 당연한 사례일 뿐이다. 뒤늦게 과오를 바로잡고 당사자 간 절충안까지 제시한 지자체의 행동도 평가받아 마땅하다. 반면 일본은 소녀상 철거를 위해 외무상과 관방장관, 주독 대사관까지 나서고도 실패했다. 사필귀정이다. 민족주의를 사실상 파시즘으로 여기는 독일의 정서를 이용해 위안부 문제를 한·일 외교분쟁으로 만들려는 행태는 시대착오적이다. 그런데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번 사안은 소녀상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 사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 정부의 개입은 문제 해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한국 정부가 적극 개입했다면 한·일 간 갈등으로 비화해 사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소녀상의 존치 여부는 독일 법원의 판단과 미테구의 결정에 달렸다. 이번 베를린 소녀상 철거 시도와 중단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미테구가 합의점을 모색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시민들과의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결과가 나오길 기대한다. 정부는 섣불리 토론과정에 개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시민사회에 맡기고 향후 대응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