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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여적

[여적] 백신 여권(201230)

코로나19가 팬데믹이 된 후 백신이 마지막 희망일 때가 있었다. 백신이 코로나19로부터 인류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그때 음모론이 머리를 내밀었다. 빌 게이츠의 ‘백신 음모론’이다. 각종 전염병 백신 개발에 헌신해온 그가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 속에 칩이 숨겨져 있고, 이 백신을 맞으면 실시간 감시를 당한다는 것이다. 게이츠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비판하자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 음모론을 들어 게이츠를 공격했다. 물론 가짜뉴스다.

연이어 들리는 백신 접종 소식이 여행 재개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이를 실현할 ‘백신 여권’ 도입 계획까지 나왔다. 백신을 맞은 이들에게 디지털 증명서를 발급해 해외여행은 물론 식당이나 공연장, 경기장 등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발상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스마트폰 앱이나 스마트 카드 형태로 개발 중이라고 한다. 현실화하면 여권처럼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코로나19 이후 시대의 자유통행증이 되는 셈이다.

 

코로나19 초기 봉쇄 국면에서 나왔던 ‘면역 여권’도 비슷한 구상이다. 코로나19 항체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인 사람에게 이 증명서를 발급, 여행이나 직장 복귀 등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에스토니아, 칠레, 중국, 유럽 일부 국가가 이 계획을 구체화하기도 했다. 반대론도 만만찮았다. 개인의 자유 제한, 차별 심화라는 윤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면역력이 불확실하다는 실무적인 이유에서다. 새로운 ‘특권 증서’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영국과 미국 남성들이 코로나19 항체 보유 사실을 들어 온라인 데이팅 앱에서 이를 무기로 여성들에게 데이트를 제안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백신 여권도 이 논란을 피해갈 수 없다. 백신 여권은 아프리카 방문 시 필요한 황열병 예방접종확인서처럼 코로나19 이후 필수품이 될 수 있다. 백신 접종 시대이지만 확보와 접종에서 국가 간 격차가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접종국과 미접종국 간뿐만 아니라 백신 여권 보유자와 미보유자 간 심각한 사회경제적·인종적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필연적으로 낳는다. 이 ‘백신 격차’를 해소하지 못하면 백신 여권은 차별과 혐오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