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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경향의 눈

[경향의 눈24] 보트피플, 세인트루이스호 그리고 아프간 난민(210826)

한 여성이 휴대전화 속 사진을 보며 흐느낀다. “두 딸을 두고 왔다. 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한 남성은 “고맙다”는 말을 연발한다. 또 다른 남성은 기뻐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비자 발급에 필요한 서류를 담은 가방을 잃어버려서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에는 희비가 교차했다. 탈레반 재집권 후 예상되는 탄압을 피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도착했다. 카불 함락 8일 만이다. 대부분 미 정부 협력자와 그 가족이다. 이들의 얼굴에는 안도와 함께 불안, 초조의 빛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도 아프간에 남겨진 이들에 비하면 행운아들이다. 이륙하는 군용기에 타려고 활주로를 달리는 시민들, 공항 철조망 너머로 던져지는 아이들…. 카불 함락 후 카불공항 상황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만큼 안쓰러웠다. 지금도 8월31일 철수 시한 안에 비행기를 타려는 인파로 아수라장이다. 

미국 땅을 밟았다고 역경이 끝난 것은 아니다.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특별이민비자(SIV)를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저 난민일 뿐이다. 난민은 자신의 운명이 남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의미다. 지난 40여년간 아프간인들의 처지가 그랬다. 옛 소련 침공과 퇴각(1979~1989), 내전, 탈레반 집권(1996~2001)을 거치며 600만명이 아프간을 떠났다. 2001년 미국 침공 이후에도 난민은 끊이지 않았다. 현재 아프간 난민은 베네수엘라, 시리아에 이어 3번째로 많다. 탈레반 재집권은 또다시 대규모 난민사태를 예고한다. 20년 미 점령기 동안 태어나 미국식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그 대상이다. 아프간 인구의 3분의 2가 25세 미만이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에 의해 길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레반과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이들이다. 특히 미국이 받아주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미국의 난민 수용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미 역사상 최대 난민 수용 사례인 ‘보트피플’ 사태다. 1975년 4월 말 베트남 패망으로 그 해 봄에만 약 13만명이 미국 땅을 밟았다.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정치적 상황은 예기치 못한 대규모 보트피플을 낳았다. 1978년 가을 시작된 보트피플 사태로 미국은 2000년까지 베트남인 80여만명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956년 헝가리 혁명, 1959년 쿠바 혁명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의회가 반대했고, 여론도 좋지 않았다. 공산주의자처럼 미국의 적이 존재할 때는 난민 수용에 우호적이었지만 미국의 패전 때는 반대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 사이 20만~40만명이 바다 등에서 스러져갔다. 아프간 난민사태는 베트남전 이후 미국이 직면한 최대 난민 위기가 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치욕적인 사건이다. ‘저주받은 자들의 항해’로 불리는 세인트루이스호의 비극이다. 이 배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독일 여객선이다. 1939년 5월 함부르크를 떠날 때 탑승객은 937명이었다. 대부분이 나치 치하 유럽을 탈출하려는 유대인이었다. 목적지는 쿠바였지만 탑승객들은 미국을 원했다. 2주 후 쿠바 아바나 연안에 도착했지만 29명만 내려준 채 선수를 돌려야 했다. 미국과 캐나다가 외면하자 결국 한 달여 만에 벨기에에 입항했다. 이들 중 245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됐다. 미국이 이들을 거부한 이유는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반이민 정서 탓이었다. 당시는 대공황의 여파로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의 광기가 세계를 휩쓸던 시기였다. 미국도 캐나다도 쿠바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인트루이스호 입항 거부 같은 치부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되살아났다.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 준동에 따른 무슬림 입국금지 조치가 그것이다.

아프간 난민이 제2의 보트피플이 되느냐는 조 바이든 행정부에 달려 있다. 여건도 보트피플 사태 때와는 다르다. 당시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나선 주지사는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10여명이 넘는다. 난민 수용 찬성 여론도 1975년에는 36%였지만 지금은 81%(CBS·유고브 조사)나 된다. 바이든은 지난 22일 “심사를 받고 문제가 없는 아프간인들은 미국에서 환영받을 것”이라고 했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결단력 있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아프간 난민 쿼터를 늘리는 일이 중요하다. 미국의 솔선수범은 다른 나라의 난민 장벽을 낮출 수 있다. 또한 실패한 전쟁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이자 ‘미국이 돌아왔다’는 것을 세계에 확인시켜주는 길이기도 하다.